[서른셋, 네팔] 3회

 방콕, 달과 노천테이블

방콕행 비행기에 앉아 자꾸 생각나는 일들을 곱씹는다. 그래도 됐던 것일까. 과연 잘 한 일일까. 기내식이 나오는 시간에만 힘겹게 눈을 떴다가 의식을 치르고는 이내 다시 잠이 든다. 여행 시작 전 며칠 동안 참으로 기이한 나날들을 보냈다. 홍대에서 새벽 4시까지 빙빙 돌던 미러볼의 잔상이 떠오른다. 해장하기에 기가 막히던 콩나물국밥집도.그 일들은 당시 인생에서 큰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졌지만 이제는 그저 지나가 버린 많은 일들 중에 하나로 남아버렸다. 모든 일은 결국 지나가버린다.


숙소는 공항에서 픽업 서비스가 있는 가성비 좋은 리조트를 예약했다. 하룻밤에 조식 포함 20,441. (그러나 조식은 정말 별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맛이었다.) 인터넷에 사람들이 얼마나 정리를 잘 해 놓는지 검색만으로도 혼자 북극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다. 너도나도 인터넷에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막상 길거리에서는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다니는 그런 시대. 서로의 눈을 보고 대화하는 것이 귀해진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유심칩을 끼운다. 안정적인 데이터 속도에 만족하며 숙소 근처 마사지샵을 검색한다.

 

셔틀을 타고 가는 길에 숙소 초입에 시장이 있는 걸 발견했다. 오늘 저녁은 저곳이다. 가방만 대충 내려두고 나와 사람이 많이 앉아 있는 노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닳아빠진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듯한 너덜너덜한 천막, 하얗게 태어났지만 누렇게 늙어버린 그릇들, 그 와중에 음식 냄새만큼은 어느 미슐랭 스타 맛집 못지않다. 일단 아무 데고 앉아있으니 아주머니가 메뉴를 가져다주신다. (안 가져다 줄 수도 있다. 태국에는 당연한 것이 없다.) 종류가 너무 많다. 외국인이 김밥천국에 가면 이런 기분이겠지. 태국에 왔으니 해산물 볶음을 골랐다. 아주머니는 영어를 하기 귀찮으신지 태국어로만 응대 하시길래 그냥 메뉴를 찍어 손으로 가리켰다. 돈은 선불, 45, 1500원 정도. 해산물이 생각보다 양이 적었지만 싸니까 괜찮다. 자칫 강하게 씹으면 구부러질 것 같은 수저로 한술 크게 떠본다. 이런 맛이라면 다 용서할 수 있다. 현지인과 외국인이 적절히 뒤섞인 길가의 노천 음식점에서 바스러질 것 같은 의자에 앉아 이름이 길어 기억나지 않는 음식에 취했다. 그리고는 영문 모를 매콤함에 입안이 얼얼해 맨 밥을 꾸역꾸역 넣은 채로 아직 파란 하늘에 뜬 달 한번 보고, 밥 한입 먹고, 또 달 한번 보고. 이 곳은 시간도, 사람들도, 나도 느리게 간다.

 

슬리퍼가 닳도록 돌아다니는 여행을 하는 편인데, 이 날은 계속 먹기만 했다. 밥이 너무 맵다는 핑계로 땡모반(수박주스)을 하나 사 먹고 나서 현지인들이 줄을 서서 먹는 누텔라 크레페도 먹었다. 앞선 여행의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마치 겨울 기근을 앞둔 곰처럼 이미 가득 찬 위에 계속 집어넣고는 혹여 밤에 배가 고플까 편의점에 가서 이것저것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사 온 음료와 군것질거리들을 늘어 놓고 쓸데없이 큰 방에 놓인 내일이면 볼 일 없는 가구들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시큰함이 나를 뒤덮었다. 내 앞에 놓인 삶이라는 광활한 우주에서 가끔 찾아오는 거대한 공허함이었다.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불러들인 걸까. 다들 내게 물었다. 왜 네팔이냐고. 나도 내게 묻는다. 이 여행의 종착지는 어디인 것이냐고. 그리고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고 답한다. 처연하리만치 적막한 평화로움 속에서 자맥질하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충분하고 완벽했다. 내일은 드디어 네팔에 간다. 



[뮤즈: 권윤진]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