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 모임] '거울'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

 소재는 거울

<출처: unspalsh.com>



[뮤즈: 심규락 작가]

<부전승> 

“아무것도 해주지 않음에 감사해”

드디어 가위바위보를 이겨내었구나
항상 유리했던 나로부터
불리했던 내가

가장 정직한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유일한 승리 방법은 비열한 포기뿐
그래야 한 명의 나라도 승리를 잔여 할 수 있기에

“이기려 하지 않아 줌에 감사해”

세로 선 나는 광학적 정직함에 철저히 입각해
그저 무승부만 평면에 그려놓았지

이제는 땅 위 더 가벼워진 그 신발들
나만은 혹은 너만은 아니, 나만은
기꺼이 신어주었음에
지상이 올려준 동아줄을 더욱 지그시 밟아본다네

“다음 토너먼트에 올라가 줘서 감사해”

둘 다 올라간다는 것엔 변함없이
마지막 날숨은 구기(球技)고 던져
그 끝마저도 입사각과 반사각은 같을 거야
심지어 모두가 Bye라는 것도

“똑같이 측은하게 울어줘서 참말로 감사해”

그리고 정말 충실히 따라줘서 감사한 마음
자칫 자연적일 수도 있는 목주름에 한 줄 더

‘나는 거울을 사랑한다. 
내가 울 때, 거울만은 날 비웃지 않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




[뮤즈: 휘게 작가]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언제부터였을까.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워지고 싶었고, 내 행동이 지나치다 생각하지 않았다.
아름다워지기 위해 거울을 닦았고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닦았을까. 변하지 않는 모습에 조금씩 지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치거나 의심하면 안 된다. 

정말 닦는다고 얼굴이 바뀔까...

순간이라도 의심을 하는 순간 거울은 다시 원래의 내 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 아름다워진 후의 내 모습만 생각하며 열심히 닦았다.
팔이 빠질 정도로 힘들고 이젠 오른팔을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감각 없는 팔로 끝이 없는 거울 닦기를 계속하고 있다.
하루쯤 시간이 흘렀을까. 끝없는 거울 닦기의 굴레 속에 지쳐 잠들었던 난 간신히 잠에서 깨어났다.
젠장, 이 와중에 모기에 물렸는지 다리가 가렵다.
어..? 팔이 왜 이러지... 가려운 다리를 긁으려 무심결에 오른손을 움직였는데 반응이 없다.
안 그래도 무리해서 거울을 닦다 감각이 없어지고 있었는데 진짜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순간 울컥 눈물이 났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도대체 아름다움이 뭔데 이렇게 까지 해야 하지.
또다시 생각이 깊어지고 자괴감에 빠지고 있었다.

그냥 다 포기할까...
너 참 나약하구나...
누.. 누구세요?
나? 하하하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것보다 자! 거울을 봐, 벌써 못 알아보게 이뻐졌네~ 이렇게 아름다운데 포기할 거야?

거울 속의 내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내가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해봐! 이 거울을 닦다 보면 넌 세상에서 제일 이쁜 사람이 될 거야. 가장 아름다운 배우.
그리고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모든 사람들이 다 너만 쳐다볼 거야.
정말 그렇게 될까...?
물론이지! 뭐 해? 얼른 다시 잡아.... 걸레..
응? 으.. 응..

그때부터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지치고 힘들어할 때마다 끝없이 날 독려했고,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고,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다.

어?! 어?!
봐봐! 내 모습이 변했어!!!!
거 봐 내 말이 맞지? 예전 모습보다 훨씬 이쁘잖아. 근데... 여기는 좀 더 닦는 게 어때?  여긴 이렇게 하고. 저긴 저렇게 
으.. 응 알았어!

‘똑똑, 똑똑똑’
누구세요?
약 드실 시간이에요. 이런, 어제 드린 약은 또 안 드셨네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 맞다. 근데.... 무슨 약이요?
하..... 매번 왜 이러세요. 오늘은 저녁 먹고 꼭 약 드세요.
그.. 그보다 저 어떤가요, 더 아름다워진 것 같지 않나요?
네~ 더 아름다우세요. 자기 전에 약 드시면 내일은 더 아름다울 겁니다. 탁자 위에 둘 테니 잊지 말고 드세요.
‘드르륵 탁.’

어때? 그 환자, 여전히 닦아?
똑같지 뭐, 주목받던 연예인이 어쩌다 성형중독에 빠져서... 성형을 10번 넘게 했다지? 성형중독에 마약까지 끝장을 본 거지..
가족도 다 포기해서 정신병원까지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없는 벽에 걸레질하고 있으니.
거울이 있다나 뭐라나, 아무튼 불쌍하지 옛날이 더 이뻤는데 말이야...
야! 너 옛날에 저 배우 인 스타에 얼굴 못 생겼으니 나오지 말라 고 악플 달았잖아 ㅋㅋㅋㅋ
에이~ 뭐 나만 그랬니~ 악플이 수~천 개는 되었을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뮤즈: 장윤재 작가]


내 마음은 10월이에요

차가운 바람이 새가 되어 날아가

뭔가 허전해 보이는 나뭇가지에 앉아

따듯한 햇살 아래 꾸벅 졸곤 합니다.


더 멀어져 가는 시리게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뜨거워지는 눈시울

나뭇가지의 작은 흔들림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날개를 펴고 하늘 위를 신나게 날아다녀요


그러다 문득 땅바닥에서 날 올려다보는

그림자의 서글픈 눈동자를 바라보면

다시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아줍니다.


저물어가는 태양 아래에서

다시 내 안으로 스며드는 그림자를 바라볼 때

나는 그저 사과처럼 조용히 익어가다

마침내 땅바닥에 힘껏 부딪히길 염원합니다.




[뮤즈: 류재은 작가]


너를 만나기로 한 그 시간에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차분하지 못했다

너를 찾는 것은 나의 몫이었으나
항상 너를 찾는 것은
거짓된 날들이었다

수많은 타인이
너를 찾아 정의 내리는 동안
나는 너를 잃었고
너는 나를 떠났다

너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계속 너를 기다리는 동안
거울에 비친 너를 보며
끊임없이 너를 찾아 헤맸다




[뮤즈: 정진우 작가]


<거울>

에베레스트에 오르기 위함
소주를 마신다

눈꽃에 비치는 나의 얼굴
소주잔에 비치는 거울의 내 얼굴

맑은 너의 눈동자 속에
너는 있었다




[뮤즈: 송진우 작가]


*[뮤즈 모임] '거울'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에 게시된 작품의 보완입니다.


N-1. 조우1 , 경시1 (아서 플렉의 집)

(브러쉬 클로즈업)
화장용 브러쉬에서 하얀 물감이 뚝뚝 떨어진다.
(붓을 따라 카메라 이동)
아서의 분장된 얼굴이 보인다. 어딘가를 응시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는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털더니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브러쉬를 든다.
(...)
브러쉬는 혀를 내밀고 있는 아서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혀에 하얀 물감을 남긴다.
아서는 완성된 광대분에 만족하며 웃음을 짓고 있다.

  아서 :(초인종 소리).......
  아서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누구세요?
  랜들 : 아 음... 우리야.

아서가 문을 열자 랜들과 게리가 서 있다.
 
 랜들 : 어떻게 지내? 소식 들었어
 아서 : ...
 랜들 :(와인을 들어 보이며) 같이 기분 좀 풀자고!
 아서 :(입꼬리를 잔뜩 올린 채) 그래. 음 게리도 있었네
 게리 :(어색하게 웃으며) 안녕..

아서가 갑자기 크게 웃는다. 랜들과 게리는 익숙하면서도 불편해 보인다.

 랜들 :(와인병으로 게리의 머리를 툭 치며) 게리 너가 치는 골프는 미니골프냐? 아하하
 아서 :(랜들을 바라보다) 
 
아서는 둘을 맞이하고 집 안으로 이동한다.

N-2. 동행1 (아서 플렉의 집)

아서는 랜들을 가위로 잔인하게 살해한다.

게리 :(겁에 질린 채) 아서!!! 그만!(두려움에 절규하며 흐느낀다.)
게리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아서 플렉을 피해 거실 구석에 숨으며) 그만해!!! 대체 왜!

아서는 게리를 힐끔 쳐다본 후 광기 어린 표정으로 랜들의 머리를 벽에 찧는다.

아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후.. 게리 놀랐지? 걱정하지 마 후.. 무서워하지 마 널 헤치진 않을 거야
게리 :(잔뜩 웅크린 채) 

N-3. 조우2 , 경시2 (방송국)


N-4. 동행2 (고담시 광장)




[뮤즈: 서정화 작가]


버스 둘째 줄에 앉은 날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택시 안에서 장대비로 변하는 아침이었다. 좁은 터미널 처마 밑에서 삼십 분을 넘게 기다리고서야 샤브루베시행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마이크로버스는 소문으로만 들었지 직접 타는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배낭을 뉘일 공간이 조금도 없을 줄은 전혀 몰랐다. 그래서 배낭을 위해 티켓을 한 장 더 사지 않았음을 타자마자 후회했다. 배낭을 옆자리에 두다가 품에 안다가 복도 바닥에 뉘어도 봤지만, 배낭의 길이 때문에 사람들은 다리를 쭈욱 벌리고 그것도 모자라 좁아터진 통로에서 폴짝 뛰어야만 했기에 미안한 마음에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버스는 사람들을 금세 채웠다. 옆자리에는 어떤 네팔 여인이 앉았다. 내가 그녀의 자리에 앉아있었기 때문에(티켓 영수증에 적힌 숫자 2와 무어라 갈겨 적힌 문자가 복도 바깥쪽 좌석을 가리키는 것인지 도저히 알지 못했다) 그녀는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말해왔다. 내 실수로 그녀와 출발부터 안면을 트면서 버스 둘째 줄에 앉은 날은 시작되었다.

그녀는 초등학생 때 나의 아버지가 갖던 손바닥 반 크기도 안 되는 작은 핸드폰을 아이폰 X가 출시된 세상에서 쥐고 있었다. 그녀는 앉자마자 버튼을 꾹꾹 누르더니 어디론가 통화를 걸었다. 그사이 버스는 출발했고 그녀의 보고도 시작되었다. 네팔어는 한 마디도 알지 못했기에 가족에게 버스에 탔다는 내용일 거라는 추측이 최선이었다. 그러다가 그녀 너머로 달리는 풍경에 장대비가 입혀진 창밖을 지켜보다가 크게 흔들거리는 버스 때문에 그녀가 쥔, 작은 화면 속 배경화면이 우연히 시야에 들어왔다. 어린아이 사진이 있는. 아이는 그녀를 빼닮았기에 눈알을 옆 끝까지 굴려보고는 또래라고 확신했기에, 내가 학교를, 여행을, 트레킹을 오는 동안의 그녀를 상상하려 했다. 그러나 내 무지 때문에-서로의 손에 쥔 핸드폰의 간극 사이에서-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음을 이내 깨닫고는 숨이 흡 하고 멈춰졌다.

샤브루베시로 가는 여정은 익히 들었었다. 자칫하면 5분은 굴러 떨어질 듯한 산 중턱의 낭떠러지 옆길을 온종일 가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에 허풍이 조금은 섞였을 거라 짐작했었다. 아니더라도 그 묘사가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는 줄 알았지만, 소문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묘사되지 않던 부분이 더 많았다. 일례로, 버스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절벽에서 길 위로 떨어진 바위 때문에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어야만 했다. 이때에도 말이 통하지 않아 무슨 일인지 알 길이 없었던 나는 나갔다가 버스를 놓칠까 하는 걱정에 제자리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무료해진 나는 그녀에게 영어로 몇 마디를 건넸다. 무어라 답하는데 내가 알아먹지 못했고 재차 묻다가 반복되는 대답까지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웃어버렸다. 미안하다는 말과 웃음에 다행히 그녀도 웃었다. 하지만 대화는 여전히 이어지지 못했다.

다시 앞 버스가 달리기 시작하며 먼지를 한가득. 내가 탄 버스가 그에 질세라 먼지를 뒷 버스에 한가득 보냈다. 두 시간을 더 달리다 버스는 갑자기 멈췄다. 혹시, 또… 하는 걱정도 잠시. 승객들의 발걸음을 확인하고 정차의 목적을 알아냈다. 화장실 가는 시간이었다. 아침부터 물을 먹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알던 진짜 화장실에 가는 일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한쪽 절벽에서 별로 감추려는 노력도 없이 용변을 해결하고 있었다. 옆의 그 여자도 버스에서 내렸다. 그녀는 반대쪽 코너로 돌아가더니 이내 창틀 밖으로 사라졌다. 버스 시동이 걸리기 직전에야 그녀는 돌아왔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안고 있던 배낭을 복도로 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옆에 앉히고 다시 뉜 배낭을 들어 품으로 안았다.

일련의 과정 후에야 그녀가 두 손을 웅크린 채로 나를 기다린다는 걸 깨달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에 내 어깨 위에서 조막만 한 손이 펼쳐졌다. 산딸기였다. 네팔에서 산딸기라니. 예상도 못 했거니와 노란 산딸기는 처음이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얼른 하나를 입안에 넣었다. 산딸기에서는 그녀의 온기 때문이었는지 따스함이 전해졌다. 몇 개 되지 않던 딸기를 나눠주고는 마지막 하나까지 내게 양보하는 손짓 때문에 우리는 다시 웃었다.

이후에도 버스는 몇 번이나 서다 달리기를 반복했다. 버스는 열 시간 동안 달렸기에 어느 사건이 몇 시에 일어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언젠가 한쪽은 가파른 산이, 다른 한쪽은 더 가파른 절벽이 있었다가 양옆이 평지인 마을이 갑자기 나타났다. 수 분을 달리다 아마도 주차장으로 이용하는 공터에서 속도를 줄이더니 버스 기사는 무어라 말하고 시동을 꺼버렸다. 나는 심하게 날리는 먼지에 인상을 찌푸리며 버스 밖으로 나왔다. 공터에는 화장실, 식당, 매점이 전부였다. 점심시간이구나 생각하며 식당에 가려다 뭘 어쩔 줄 몰라 화장실에 먼저 갔다. 그리고 마주한 식당에서는 모두가 달밧을 먹고 있었다. 먼지 가득한 도로 옆에서 뜨거운 밥을 맨손으로 오물 쪼물 모아 올려 입에 집어넣는 사람들을 보자 목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무얼 먹은 것도 아닌데 배가 고프지 않아 졌다. 그래서 밥을 먹는 대신 옆의 매점에서 간식을 사기로 했다.

매점 안쪽에서는 어린아이들이 파리가 들끓는 바닥에 얇은 천 하나를 깔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계산하는 아이 맏이 한 명만이 홀로 깨어있었다. 긴 매대에서는 사람들이 질서 없이 물건을 사 갔다. 나는 무엇을 살지 고민하느라, 어떻게 사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네팔리들을 지켜보느라 한참을 서 있었다. 마침내 주문하기 위해 매점의 아이가 내 욕망을 발견하기를 바랄 무렵, 나는 시야의 사각에서 꾸물거리던 그녀를 발견했다.

다른 승객이 달밧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갈 때, 그녀는 화장실에 갔다가 물 몇 모금을 마시고 버스 그늘에 쪼그려 앉았던 것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흥미로웠는지 아니면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인지 내 눈에는 잡초로만 보이는 풀밭 속을 오리걸음으로 헤치고 있었다. 그동안의 네팔리와, 오늘의 작은 핸드폰과, 산딸기와, 달밧이, 어쩌면 내 모습이 겹쳐서였을까. 그녀가 돈을 아끼기 위해 점심을 먹지 않는다고 생각해버렸다. 정말로 궁핍한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고 다시 만날 일은 더욱 없으니 결정은 느낌대로가 최선이었다.

간식을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먼지 덮인 나무 선반과 그 선반에 나름의 규칙대로 올려진 과자를 보고 있었다. 무엇을 얼마나 사야 할지 고민이었다. 음식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동정했다는 마음을 들키지 않았으면 했다. 혹시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한가득 사려던 계획이 이런저런 마음속에서 하나씩 버려졌다. 그렇게 결정에 애먹고 있을 무렵, 매점의 맏이 아이가 내 앞에 왔다. 나는 당황한 채로 주문을 말해버렸다.

내 손에 쥔 것은 고작 음료 두 개였다.

버스 안에서 한참을 기다렸던 나와는 다르게 출발 시각을 아마도 알고 있었던 듯이 그녀는 또다시 직전에야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녀 몫의 음료를 건넸다. 흠칫 놀라더니 내 것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배를 통통거리다 쓰레기통으로 던지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그녀는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다행히 음료가 입에 맞았는지 잘 먹었다. 쓰레기를 버려 준다는 내 말에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대신에 자신의 가방 옆 주머니에 빈 노란 음료 상자를 끼워 넣었다.

지붕이 몇 개 보이더니 버스는 다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여전히 모른다. 나는 챙이 둥근 모자를 코에 걸쳐 눈과 얼굴을 먼지 맛이 나는 오후의 햇빛으로부터 감추고 잠들었다. 울퉁불퉁한 도로 때문에 몇 번이나 눈이 뜨여졌지만, 아직도 비탈길 위라는 것을 보고는, 깨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잠들었다.

언젠가 큰 인기척을 느끼고서야 모자를 들쳤더니 그녀가 옷을 걸치며 버스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 나도 내려야 하나. 같은 목적지였으면 좋겠다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곁눈질하는데 다시 숨이 멈춰졌다.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사는구나 할 정도의 마을. 나는 반도 떠지지 않은 눈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배웅하는 일에 만족해야 했다. 그 후로도 버스를 몇 번이나 탔지만 날리는 먼지가 금가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어떻게 배웅을 잘할 수 있을까. 아무 해답도 꺼내지 못하고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만 보았다. 가방에 여전히 끼워진 빈 망고 음료수를 보면서 그녀의 축복을 바라는 나의 소망이 전해졌기만을 기도했다.

버스는 그녀가 내리자마자 출발했다. 옆자리가 비었기에 그녀가 있던 자리로 옮겨 앉았다. 넓어진 자리에 잠시 편해졌다가 마음에 응어리가 느껴졌다. 이것이 동정인지, 호감인지, 알지 않던 어떤 감정인지 정의 내리지 못했다.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는 아쉬움과, 그녀가 아이와 재회하는 모습과, 그녀 삶에 대한 호기심과, 가족에게 내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다시 덜컹거리기 시작하는 버스 때문에 내장과 식도를 오가며 섞이기 시작했다. 졸음과 구토감 속에서 눈을 반도 뜨지 못한 채로 절벽에 더 가까워진 창에 기대었다. 그녀가 간 이후부터 해 질 녘에야 도착한 샤브루베시까지 무거운 머릿속은 텅 비어있었다. 마음은 몇백 줄이나 옮겨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내 몸은 출발 때나 도착 때나 여전히 버스의 출입문이 앞 승객 너머로 보이는 둘째 줄이었다. 그리움 가득한 그 자리에서 일어나 트레킹이 시작되는 마을 땅을 밟을 때까지도 오늘을 실감할 수 없었다. 버스는 모두를 내려주고서 조금 달리다 도롯가에 멈춰 섰다. 나는 버스 옆을 굳이 한 번 더 지나치며 오늘을 남기려 애썼다.




[뮤즈: 김지해 작가]


<개와 늑대의 시간> 

해가 저물어 어스름이 깔리는 시간을 프랑스에선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가까스로 형체만 구분할 수 있는 저녁노을 속에서 내게 다가오는 저것이 나의 충실한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다. 얼굴에 닿는 찬물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오늘 있을 시위와 남을 가족들에 대해 끝없이 생각했다. 선봉장은 이번이 가장 큰 시위가 될 예정이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만큼 많은 이가 다치거나 죽게 되겠지. 
세면대 거울에 비친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타고 물이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내 얼굴에서 문득 낯선 얼굴이 보인다. 결의에 차 있는 것 같기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얼굴. 거울 속에 비친 내가 나인지, 나를 망가트리려는 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슬프게도 내가 한 선택은 때때로 나의 삶을 망치기도 한다.

오늘 집을 나서면 아주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글라스와 마스크, 빈 병, 갈아입을 옷을 가방 속에 넣는다. 그리고 조끼 양쪽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에 얇은 철판을 넣은 뒤, 조끼를 접어 마저 챙긴다. 점점 더 과격해지는 그들의 진압 행위를 생각하면 이렇게라도 해야 안심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지갑에 넣어둔 가족사진을 빼서 한동안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 하얀 티셔츠를 맞춰 입고 있었다. 사진 속 엄마와 아빠는 어색하게, 남동생은 해맑게 웃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표정 없이 저 너머를 응시하고 있다. 신분증과 사진을 신발장 위에 올려두었다. 혹시라도 그들이 내가 누구의 자식인지, 누구의 누나인지 알게 되면 좋을 게 하나 없을 테니까. 신원미상의 시체가 되는 편을 선택했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시위가 열리고 있는 ()로 향하는 전철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본다.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지금 그들이 들이닥쳐 시민과 늑대를 구분하라고 하면, 구분해내지 못할 것이다. 비로소 내가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때, 나는 그들에게 ‘개’가 아닌 ‘늑대’가 될 것이다. 당신들의 충실한 심복의 얼굴을 하고, 당신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이다. 

비록 내 삶을 망칠지라도.




[뮤즈: 김다빈 작가]


*[뮤즈 모임] '거울'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에 게시된 작품의 연작입니다.


<전사의 마지막 싸움-2편>

BB-!!!!!
[4라운드~ 이렇게 끝납니다. 이제 승부는 마지막 5라운드로 이어집니다!]
“헉... 헉...”
방금 전까지 피로 물든 바닥에서 구르던 동준은 스태프들의 도움으로 몸을 겨우 가눴다.
“시현아! 스탬프!”
얼린 스탬프를 받은 황진성 코치는 부어오른 왼쪽 눈에 스탬프를 붙였다.
“하... 이제 1라운드 남았는데!”
도저히 멈춰지지 않는 출혈과 시야를 가릴 정도로 부어오른 눈두덩이가 문제였다.
더 이상 잘라낼 피부도 부족한 상황에서 동준은 가글을 하며 핏물을 뱉어냈다.
“관장님.”
“아무 말하지 마! 지혈하고, 시야는 내가 꼭 막아주마!”
스태프들이 필사적으로 응급처치를 하는 가운데, 동준은 오른쪽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봤다.
환호성에 귀가 멎을 것 같았고, 저 멀리서 거대한 대포 카메라로 나를 찍고 있는 민아도 보였다.
그때 동준을 향해 우희진 주심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동준을 향해 물었다.
“김동준 선수, 지금부터 간단한 메디컬 테스트를 하겠습니다.”
“오늘이 며칠이고, 여기가 어디냐고 물을 거면, 아까 대답했어.”
동준은 뇌진탕 증상에 대한 심판들의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하지만 희진은 곧바로 동준에게 말했다.
“지금 상대가 누구고, 몇 라운드째입니까?”
“....”
갑자기 말을 잊지 못하자 희진은 대답 여하에 따라 곧바로 심판의 재량으로 이 경기를 끝내려 했다.
“5라운드 시작하고 루이스 애너하임, 더 물을 거 없으면 이제 일어나도 되겠어?”
“.... 음.”
그동안 숱하게 봐 왔던 얼굴이지만 오늘은 더욱 단호하게 그 이상의 싸움을 말리고 싶은 희진이었다.
“관장님. 거울 좀 볼 수 있어요?”
“뭐?”
그때 시현이 바로 거울을 건네줬고, 엉망이 된 자신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번 시합이 끝나면 한 번 더 여기저기 꿰매야 될 것 같은 왼쪽 눈가.
심은지 2년이 안됐는데 다시 흔들리는 어금니의 임플란트.
멈추지 않는 입안의 출혈과 혀 밑에서 느껴지는 패인 감촉.
하지만 그 얼굴을 비추며 뒤에서 자신을 향해 외치는 이들이 보인다.
체육관의 친구들, 규모는 적어도 자신의 전신이 드러난 깃발을 휘날리는 팬들이 보인다.
그리고 거울을 돌려 비춘 곳에서는 어느새 카메라를 내린 채 이쪽을 바라보는 민아가 보였다.
“거울은 잘 보여요?”
거울을 가지고 이리저리 비추는 동준을 보고 걱정스럽게 묻는 시현 코치에게 동준은 씨익- 웃으며 손에 거울을 쥐어주었다.
“아주 잘 보이네!”

B-!!!!
[자! 이제 마지막 5라운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립니다! 루이스 애너하임! 그리고 브론즈 키드! 김동준!]
[두 선수... 정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전사의 싸움! 감히 말하건대 올해를 넘어 NFCC 역대 최고의 명경기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5라운드 동안 쉬지 않고 그라운드와 타격 공방을 주고받았던 동준과 루이스는 만나자마자 웃으면서 마주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드를 내린 채로 다가와 가까이 선 둘은 악수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한 존중을 보였다.
“-!@-=!@...Standing match..-##$ Right?”
“영어로 뭐라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스탠딩 타격 가자고?”
동준도 바라던 바였다.
여기서 서로 부여잡고 그라운드 싸움하면, 아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게 어느 쪽이던 간에 말이다.
[두 선수 글러브 터치 이후 이제 타격 전으로 가게 됩니다!]
둘 다 가드를 든 손이 후들거리고 있을 때, 루이스의 몸이 움직였다.
쩍-!
[우워어어어!!!!!!]
[오버핸드 라이트 훅! 제대로 들어갔습니다! 우희진 주심 바로 경기를 끝... 아아! 다시 일어납니다. 김동준!]
[자! 루이스의 필살기라고 할 수 있는 일격이 갔는데 한 방은 버팁니다!]
서로 거리를 재다가 큰 걸 한 방 얻어맞아버렸다.
황급히 일어났지만, 어째서인지 한쪽 시야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동준이었다.
‘결국 터졌나...’
왼쪽 눈에 상처가 기어이 회복 불가 수준까지 된 상태에서 오른 눈만으로 거리를 재면서 상대해야 됐다.
그리고 다시 달려드는 루이스 애너하임, 동준이 그대로 발을 뻗었다.
짝-! 
[아! 일단 로우킥! 그리고... 아! 미들킥까지! 5라운드 내내 갈비뼈 부상이 의심되는 루이스 애너하임이에요!]
올림픽 시절부터 장기였던 옆차기로 친 순간 감촉은 확실했다.
내가 한쪽 눈이 안 보인 채로 싸운다면, 저 녀석은 갈빗대가 두 대 이상 부러진 상태에서 계속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루이스 애너하임! 가드를 내리고 다시 달려듭니다! 오른손! 원투! 김동준 선수 위기입니다!]
[아! 하지만 받아내고 있어요! 계속 반격합니다! 두 선수의 노가드 매치! 정말 대단한 투혼입니다!]
방어 따위 버린 채 손과 발이 움직이는 대로 눈 앞의 상대를 샌드백이라 생각하고 사정없이 두들겼다.
콰직!
스트레이트 펀치에 눈 앞에 빛이 번쩍일 때, 그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Come on!!!! Come on! Bronze Kid!!!!!”
자신의 링네임을 부르며, 도발하는 루이스를 향해 동준은 발을 들어 올려 옆구리를 찍으려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바디를 방어하는 루이스... 그 순간 동준의 왼손이 루이스의 턱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1만 2천여 명의 잠실 실내체육관의 열기가 더욱더 끓어오르고, 관객들은 이 역사적인 매치에 더없이 환호했다.
[동준 선수! 왼손! 오른손! 한 방 한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루이스 애너하임! 오우!!!! 곧바로 카운터가 들어갔습니다. 남은 시간 1분 20초!]
[아! 이거는 한쪽이 무너지면 바로 경기 중단해야 됩니다! 이제 정말로 결착을 앞둔 한 방 싸움으로 갑니다!!]
해설 위원들도 최대로 흥분한 상태로 움직이는 가운데 동준은 그대로 달려들었다.
루이스 역시도 이 한방에 끝내겠다는 듯이 온 힘을 다해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동준의 머리에 날렸다.
콰직!!!!
“....”
“!!!!?”
힘차게 뻗은 주먹이 동준의 이마를 강타했고, 그 순간 루이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동준의 마지막 펀치가... 무너져 내리는 거산 루이스의 턱에 정확히 꽂아 들어갔다.
그리고 후속타가 들어가기 직전... 눈앞에는 익숙한 여성의 얼굴이 보이고 동준의 몸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B!!!!]
[우희진 주심 들어갔습니다!~ 경기... 끝났습니다!!! 5라운드 TKO!!! 브론즈 키드 김! 동! 준!!!!]
희진은 곧바로 루이스 애너하임의 두 눈을 체크하고는 의료진을 불러 황급히 오른손에 글러브부터 벗겼다.
“Dam it....”
마지막에 회심에 일격이 잘못 들어가 자신의 주먹이 골절돼 버린 루이스였다.
‘초반에 잘못 맞은 갈빗대... 냉정하지 못하게 진흙탕 싸움에 계속 휘말린 것....’
패인에 대해 홀로 자책했지만 휘청거리면서 링 줄을 부여잡고는 다시 자세를 잡으려는 동준을 보고 루이스는 눈을 감았다.
‘아니... 모두가 변명이지. 그냥 그가 더 강했어.’
루이스는 메디컬 팀의 응급처치를 받으며 쓴웃음을 짓고 일어났다.

“후우.... 후우...”

링줄을 부여잡고 겨우 몸을 가누는 동준, 그리고 그 앞으로 조용히 올라오는 민아가 있었다.
“....”
“...수고했어.”
팔에 걸린 핸드백에서 생수를 꺼내 동준에 입에 물려줬다.
동준은 그 생수를 반쯤 다 흘리면서도 받아마시며 핏물 가득한 얼굴을 훔쳤다.
“정말... 수고했어.”
링을 경계로 동준을 끌어안은 민아를 한 손으로 붙잡은 동준은 엄청난 환호와 뒤이어 달려오는 자신들의 팀원들을 향해 하늘 높이 오른손을 뻗어 올렸다.
NFCC 역사상 최고의 업셋 경기이자, 역대 최고의 헤비급 매치로 남은 그 날의 경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네! 저는 지금 역사적인 빅 매치가 이뤄진 잠실 실내체육관에 나와 있습니다. 김동준 선수! 오늘 정말 대단한 시합을 해 주셨는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 좋아요."
쿨한 대답에 관중 들의 환호성이 더욱 울려 퍼졌다.
"네, 그렇... 군요. 김동준 선수. 오늘 경기에 대해 어떻게 풀어나가셨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냥... 보너스 노리고 악착같이. 했어요. KO보너스.... 승리 보너스... 데일리 매치 보너스... 다 합쳐서! 돈이 많이 필요해서..."
역사적인 매치를 치른 뒤에 그 후일담 인터뷰는 그야말로 쿨함의 극치였다.
아나운서의 당황 속에서 동준은 승리의 포즈를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펼쳐 보였고, 그 순간 누적된 대미지가 몸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웃?!"
자신도 모르게 휘청거리면서 바닥이 보일 때 그를 향해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리고 동준이 기억한 것이 그 날의 마지막이었다.

*****

"자! 모두 잔 들어! 술 꽉꽉 채우고!"
한 달 뒤 체육관 인근의 포차에서 동준을 포함한 JS짐의 선수와 관계자들은 모두 저마다의 잔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해서 이 몸은 총액 4억 5천만 원의 파이트머니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우우우!! 동준 형님 나이스!"
환호 속에서 동준은 건배사를 올리고는 한잔 크게 들이켰다.
"체육관과 부대비 등 이것저것 떼고도 순수익은 3억 이상! 이 돈은 고스란히 나의 미래를 위해 갈 것이며, 그동안 모아 놓은 돈으로 이사 갈 거다!"
"인생 한 방이네요!"
"그럼~ 정말 한 방이지!"
동준은 후배들의 축하 속에서 한 잔씩 축하주를 받은 뒤 얼굴이 벌게진 채로 민아에게 다가갔다.
"아~ 이제 모든 고비 다 넘긴 것 같다."
"아까 아빠한테 전화 왔어. 오늘 인사 왔을 때 정말 살 떨리셨대."
8시간 전만 하더라도 떨리는 마음으로 우진의 추천대로 수트 핏을 맞춰 민아네 집으로 인사를 갔었었다.
금지옥엽 키운 외동딸의 혼전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어떤 놈팽이 짓인지 가만 안 두겠다는 식으로 살기 등등하게 죽도를 준비했던 민아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집에 들어온 거인에게 순간 굳으셨고 웃으며 반겨주신 어머님 덕에 인사와 상견례와 결혼 일정도 잘 끝나게 되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탄산음료를 마시면서 물어본 민아의 질문에 동준은 소주를 홀로 따르며 자신이 생각한 미래를 말했다.
"일단 시합은 쉬고 싶어. 저번에 거울 봤을 때 안 그래도 으스러진 머리가 더 흉해졌더라고... 보여? 결국 12 바늘 더 꿰맸어"
아직도 흔적이 선명한 수술 자국을 보인 동준은 소탈한 미래를 말했다.
"집 마련되면 코치 제안 온 것도 고려해봐야겠어. 월 300은 준다고 하니 셋이 먹고 사는데 문제없을 거야. 그 이후의 계획은 모르겠지만..."
동준은 그렇게 말하면서 부디 태어날 아이를 생각했다.
"딸이면 피아노 시킬 거고 아들이면... 웬만한 건 다 하겠는데 만약 이쪽일 따라온다면 패서라도 말릴 거야."
"흐응... 그렇구나."
"현역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나 코치에 네가 잡지사 계속하면 사는데 문제없잖아?"
"음... 한 명쯤은 그렇겠지?"
민아의 말에 동준은 피식 웃으면서 소주를 따랐다.
"솔직히 둘째는 모르겠어. 요새 돈 쓰는 일이 좀 많다잖아. 나도 이제 현실적으로 살아야지..."
"미안해. 둘째도 모를 리가 없을 거야."
"...응"
민아는 활짝 웃으면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동준의 손을 꼭 붙잡고 자신의 배에 가져다 댔다.
"쌍둥이래. 아빠 닮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뭐?"
"고로 당신이 생각한 계획은 모두 2배라고 생각하고 생활비를 잡아보자고."
"....진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선 뭐든지 존중할게. 나도 두배로 같이 움직여 주면 되니까."
동준은 그 말에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주병을 들어 올렸다.

"야! 다들 잔 다시 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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